부엌 불만 켜고 저녁
하루 종일 화면만 보다가 저녁때 부엌 전구 하나 켜면 갑자기 손이 할 일이 생긴다. 냄비에서 김 올라오는 동안은 아무 생각도 안 나서 좋다. 졸린 채로 머그 들고 창밖 어스름 보는 이 5분이 오늘 제일 멀쩡한 시간.
냉장고 빛만 켜져 있다.
잠은 안 오고 우유는 안 따랐다.
새벽 두 시는 우유보다 그냥 빛이 더 차게 느껴진다.
다시 자려고 일어났는데 어쩐지 잠은 더 멀어진 기분.
아침 8시. 커튼 사이 햇살이 머그 옆면을 가른다.
토스트는 다 식었고 머그만 손에 남았다. 햇살이 차갑게 들어와서 한쪽 눈만 살짝 찌푸렸다. 아침 인사.
보리차 미지근해
어느새 새벽 6시 부엌 창에 푸른 빛 살짝 들었다 한 잔 더 데우기는 귀찮아서 그냥 마심
잠 안 와서 물 끓이러 나옴.
머그 들고 한 컷. 새벽 네 시 부엌 톤. 창밖은 아직 어두움.
02시 부엌 코코아
새벽 두 시 부엌 식탁. 잠이 안 와서 코코아 한 잔. 책을 펴긴 했는데 글자가 안 들어옴. 백열등 노란 빛만 좋음.
차 한 모금에 손이 데워진다. 펜던트 하나만 켜뒀어.
자정 부엌 카운터. 후드 안쪽이 더 포근하다. 한 모금 더 마시고 자야지. 한 모금. 한 페이지.
잠 안 와서 물 한 잔 끓였다. 부엌만 켜둔 펜던트가 머그를 노란 동그라미로 만든다.
도시는 자고 나만 깨어있는 정적. 카운터 차가운 면에 손 대고 한참 서 있었다.
18시 부엌 카운터 옆 황혼 직전
차 식어가는 동안 잠시 멈춤. 5월 말 해가 길어진다.
오후 4시. 차가 아직 뜨거워서 입술만 대고 있다.
창문이 길어서 햇살이 카운터를 가로지른다. 카디건 단추는 풀어두지 않았지만, 머그가 손에 따뜻하다.
안경에 김이 끼면 잠깐 눈을 감게 된다.
평일 저녁 8시. 오늘은 면을 길게 두고 먹기로 했다.
정오 부엌, 식은 커피랑 사과 두 조각
5월 한낮 햇빛이 블라인드 사이로 들어와서 카운터에 줄무늬 그림자 만든다. 사과 깎다가 멍해졌다. 점심이라는 게 매번 이렇게 어중간하다.
월요일 저녁 여섯시. 낮 일과는 끝났는데 저녁 일은 시작 안 한 그 사이.
창밖은 푸른 황혼으로 빠르게 식어가고, 부엌엔 펜던트 노란 불빛 하나. 식어가는 머그를 들고 카운터에 비스듬히 기대선 채 잠깐 주춤.
여덟시. 식탁 위 토스트와 따뜻한 우유.
잠이 덜 깬 채로 식탁에 앉았다. 우유가 식기 전에 한 모금. 창으로 들어오는 빛이 조금 길어졌다.
열두 시. 도시는 한참 점심인데 나는 이제야 첫 끼를 마주한다
열두 시. 도시는 한참 점심인데 나는 이제야 첫 끼를 마주한다.
그릇 위에서 김이 한 줄기 천천히 휘어진다. 새벽이라는 이름과 정오의 빛이 식탁 위에서 잠깐 만난다.